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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공중의 왕자, 케빈 데이비스

침대 위 꽁치 2021. 9. 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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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공권은 나의 것

데이비스는 1993년 체스터필드 소속으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잉글랜드 3부 리그에서 데뷔한 것이지만, 당시 만 16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능은 확실했음을 알 수 있다.

 

연령별 대표팀에서 나름 기회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데이비스는 확실히 유망한 공격수였다.

 

하부 리그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던 데이비스는 1997년 사우스햄튼으로 이적하며 처음으로 1부 리그 무대를 밟게 됐다.

 

첫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나름의 기동성과 왕성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괴롭히며 까다로운 공격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리그에서만 9골을 잡아냈고, 각종 대회를 합치면 12골을 넣으며 1부 리그에서도 자신이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허나 EPL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블랙번 로버스의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지만 철저히 실패했다.

 

궁합이 좋았던 사우스햄튼으로 돌아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활약했지만, 인상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하부 리그 클럽인 밀월으로 임대를 다녀오는 굴욕도 맛봤다.

 

위기에 몰린 데이비스를 구원한 인물은 바로 볼튼의 수장이었던 샘 알라다이스였다.

 

조직적인 수비와 선 굵은 공격으로 볼튼의 돌풍을 이끌었던 알라다이스 감독은 팀의 최전방 공격수로 데이비스를 낙점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데이비스는 자신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순식간의 팀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성실한 움직임과 끊임없는 도전 정신이 결합된 그의 공중볼 능력은 피지컬이 뛰어난 수비수가 득실한 EPL에서도 최상위 수준을 자랑했다.

 

나름의 득점력은 기본이고, 동료들의 플레이까지 살리는 데이비스의 가치는 생각보다 높았다.

 

볼튼에서 활약한 열 시즌 동안 모두 리그에서 30경기 이상 출전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당시 EPL을 지켜보는 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수준까지 활약했던 데이비스는 2010년에는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감격의 데뷔전을 가지기도 했다.

 

볼튼에서 무수한 역사를 썼던 데이비스는 2013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로 이적해 두 시즌을 활약한 뒤, 만 38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2. 최고의 순간 - 2007~2008 시즌 UEFA컵 조별리그 2차전

데이비스는 프로 통산 무려 818경기를 소화했다.

 

아쉽게도 빅클럽에서 뛴 경력이 없어 유럽 대항전 경기는 딱 13경기를 소화하는데 그쳤다.

 

그 13경기에서도 넣은 골은 딱 1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1골은 그의 경력에 있어 매우 귀중하고 특별했다.

 

볼튼 소속으로 데이비스는 2007-2008 시즌 UEFA컵(현 유로피라그) 조별리그 2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 원정을 떠났다.

 

경기 내내 영향력을 발휘하던 데이비스는 팀이 1-2로 패색이 짙던 순간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가르며 팀을 구원했다.

 

당시 뮌헨 수비진에는 올리버 칸을 비롯해 반 봄멜과 루시우 등 거대한 영웅들이 있었음에도 데이비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데이비스가 자신의 오랜 선수 경력에 의미 있는 방점을 찍었던 이 순간은 최고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3. 최악의 순간 - 2011~2012 시즌 EPL 최종전

볼튼은 데이비스와 함께 오랜 기간 EPL의 터줏대감 노릇을 했다.

 

열악한 환경에도 데이비스와 같은 베테랑 선수들과 이청용과 게리 케이힐로 대표되는 젊은 선수들의 절묘한 조화로 꽤나 좋은 성적을 한동안 유지했었다.

 

불행히도 2011-2012 시즌에 한계에 부딪쳤다.

 

당시 시즌 내내 고전한 볼튼은 37라운드 종료 기준 18위에 머물려 강등 직전까지 몰렸다.

 

리그 최종전이 38라운드에서 승리하면 순위 역전이 가능했지만, 볼튼은 2-2 무승부에 그치며 결국 강등의 쓴맛을 봤다.

 

이날 경기에서 데이비스는 팀의 역전골을 넣는 등 활약했지만, 팀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팀의 주장 완장을 차고 있었던 그에게는 더더욱 아픈 결과였다.

 

볼튼이 2012년에 강등 당한 후,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데이비스에게 이 순간은 최악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4. 종합적인 평가

데이비스는 당대를 대표하는 공격수는 아니었다.

 

길었던 커리어 내내 1부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한 기억이 단 한 번에 불과하기에 그러하다.

 

다만 그는 득점 이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다소 부족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볼튼에서 부동의 공격수로 군림한 이유가 있다.

 

또한 선수 생활 내내 특별한 장기 부상 없이 팀을 위해 헌신했던 선수다.

 

많은 팬들이 매 경기마다 전력으로 임했던 데이비스의 태도에 여전히 감명을 받고 있다.

 

데이비스는 위대한 공격수는 아니었지만,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공격수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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